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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리 (LiveRe)/댓글로 세상보기

댓글로 세상보기(13) - 인터넷이 실명제에게


<댓글로 세상보기>는 시지온이 ‘소셜’과 ‘댓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국내외 인터넷 관련 산업 동향을 분석한 보고서를 외부와 정기적으로 공유하는 서비스입니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해외 사례들의 소개와 라이브리가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 인터넷이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지온만의 관점과 통찰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댓글로 세상보기 (13)

인터넷이 실명제에게




안녕. 실명제. 


안녕. 실명제. 난 인터넷이야. 중국이 공업정보화부(工业和信息化部)에서도 2012년이 되어서야 전국구로 확대하는 인터넷 실명제를 자유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제한적 본인 확인제란 이름으로 2007년부터 본격 실시해줘서 고마워.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2012년 8월 23일에 실명제가 실시된지 5년만에 친절하게 밝혀준 것처럼, "불법정보 게시로 피해가 발생한 경우 가해자 특정은" IP 등의 추적을 통해 확인 가능하고, "피해자 구제는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에 의한 당해 정보의 불법 정보 취급의 거부 정지 또는 제한명령 등으로" "사후에 손해배상이나 형사처벌"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 동안 행정기관에 의한 사전규제(事前規制)를 무리하게 진행해온 것 말이야. 덕분에,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치명적 개인정보가 강제적으로 입력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개인정보는 전세계인의 공공재가 되었지. 한국인의 희생 덕분에 전세계인들이 실명제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사실 나로서는 너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 같아.


물론, 난 아직 너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어. 이번 헌법재판소 판결로 정보통신망법상 실명제는 폐지되어, 이젠 게시판에 실명제를 적용하고 하지 않고는 온라인 서비스 제공자(OSP)의 자율이 되었지만, 너는 아직 완전히 날 떠난 건 아니니까. 원조 실명제인 공직선거법상 실명제가 건재한 만큼 오는 대통령 선거를 포함하여 선거기간 동안에 너는 부활하겠지(물론, 이번 국회 본회의 때 폐지로 결정되면 또 달라지겠지만). 그리고 너를 만든 바탕인 나(인터넷)을 관리하는 데 '개방, 표준, 선택'보다는 '허가, 인증, 확인'이 낫다는 20세기의 신념은 일부에서는 아직 굳건하니까. 그렇지만 너의 몸체 중에 가장 큰 것이 떨어져 나간 건 의미가 있지 않겠니? 그 맥락에서 난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써.



인터넷은 다르고, 그래서 인터넷 규제도 달라야 해


사실 이 얘기를 꼭 해주고 싶었는데, 5년 동안 못했어. 그러나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젠 우리 관계에도 의미 있는 변화의 시점이 왔으니까, 꼭 해주고 싶어. 너가 왜 실패했는지, 그 핵심적 교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것은 인터넷은 다르고, 그래서 인터넷 규제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야.


먼저, 난 전화선이 아니야. 나도 선(wire)으로 연결되어 있는 네트워크인 것은 사실이지만, 전화는 받는 사람이나 거는 사람이나 '통화'라는 기능 밖에 수행하지 못하는 반면에 나는 그 기능에 무엇이든 '추가'될 수 있고,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의 자유야. 즉, 나는 허가가 필요 없는 네트워크야. 나는 중앙에서 기능을 결정하지 않고, 변방(end-host)에서 기능이 결정되고, 그렇게 성장을 해 왔어(학술적으로는 end-to-end principle이라고 함).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디자인되지 않았다면, 인터넷이 지난 수십년 동안 지속적인 기술 혁신, 사회 혁신을 해오지 못했을 거야. 다시 말하면, 난 특정 개인, 특정 조직의 혁신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창조성의 산물이야. 나는 어느 국가나 지역이 아닌, 이 인류의 공유 자원이야.


그렇지만, 날 기존의 신문, 방송과 같은 미디어와 같이 취급하는 것도 곤란해. 난 기존 통신 인프라와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기준 미디어와 같지도 않아. 난 새로운 미디어이며, 상식 밖의 미디어일 수도 있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줄게. 나는 내 이름 그대로 네트워크의 네트워크인데, 네트워크끼리 서로 말을 하려면 약속이 있어야 해. 그걸 프로토콜이라 부르고, 내가 쓰는 대표적 프로토콜은 TCP/IP야. 말하는 사람의 방식(application)과 말하는 내용의 전송(transportation)이 말하는 사람(IP)을 중심으로 분리되어 있고, 말하는 사람(IP)은 그 방식과 내용이 어떻게 바뀌든지 영향을 안 받는다는 거지. 예를 들어서, 나는 너(IP)가 이메일을 보내든, 문서를 올리든, 동영상을 실시간(on-demand)로 감상하든, 똑 같은 패킷으로 처리하고, 너가 철수이든 영희이든 나는 관심을 갖지 않아.


그리고 이런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인터넷은 기존 미디어 규제 방식으로 규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아. 방송은 공중파에서 케이블로 넘어가면, 전파 자원을 사용하는 방식이 바뀌기 때문에 새로운 규제가 필요할 수 있어. 내용이 바뀌면, 미디어의 성격도 바뀌니까 새로운 규제가 필요한거지. 그러나 나는 말하는 방식과 내용과 관계 없이 중립을 유지하는 설계를 갖고 있어. 따라서 내용이 바뀌어도 미디어의 성격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어. 오히려 최근에 보이스톡 사건으로 불거진 망 중립성 논란에서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해. 따라서 사실 나는 기존의 통신 규제, 미디어 규제로 규제를 받는 게 적절하지 않아. 나는 개방적인 네트워크이고, 분산적인 네트워크인 인터넷이니까.



인터넷에 맞는 규제


그러나 나는 나에게 규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냐. 내가 개인이나 국가에게나 너무나 중요한 이상, 나를 완전히 자율로 맡겨두기에는 문제가 있겠고, 무리가 있겠지.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해달라는 것도 너무한 요구일 테고, 일부는 국가간 간섭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인터넷으로 사기치는 사람들은 처벌해야지. 인터넷은 자유지만, 사기는 죄니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고, 지켜야 할 권리가 있으니까. 그리고 사실, 너도 그렇게 시작한 거잖아? 나름대로는 악플로 상처받는 사람들을 지켜보겠다는 좋은 취지로 출발한 거니까. 그렇지만, 너와 나의 5년의 관계 동안 우리가 배운 건, 인터넷이 중요한 만큼, 규제는 필요하지만, 신중할 수 밖에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내가 지금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쓰고, 나에겐 나에게 맞는 규제가 필요한 배경을 기존 통신과 미디어와 비교하면서 설명해 준 까닭이고. 이제부턴 실제 내게 규제가 필요하면, 그 규제는 어떤 것이면 좋을지에 대한 얘기를 해주려고 해.


1969년 알파넷으로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기술만 실험해온 것은 아냐. 나는 새로운 사회도 실험해 왔어. 전통 조직들은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top-down) 구성이 되어 있어. 가장 대표적인 조직인 국가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의 표현을 빌리자면 "합법적으로 폭력을 독점한" 기관이잖아. 그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당 조직이 운영될 수가 없기 때문이지. 역시 20세기 조직인 것은 마찬가지인 학교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돼. 교사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시키는 것은 "조용히"하라는 거잖아.


그러나 나를 관리해 온 방식은 달랐어. 나는 국가, 기업, 시민사회, 전문가, 기술진들의 거친 합의(rough consensus)를 통해 발전해왔어. 나의 기술적 표준을 정하는 인터넷 엔지니어링 테스크 포스(IETF)나 애플리케이션 층에서 내가 표현되는 방식을 정하는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과 같은 단체들이 대표적이지.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CANN)는 운영상 불투명하고, 특정 국가(미국)에 편향됐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지만 그건 예외적이야. 대체적으로 나는 특정 국가, 특정 단체가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의사 결정하는 방식으로 관리되지 않았어. 나는 다소 시간이 걸리고, 거칠더라도 다자간 수평적 협의를 통해 발전해 왔어. 신기하지? 전세계를 연결하고, 앞으로는 행성간을 연결할 수도 있는 이 거대한 네트워크가 그러한 다양한 집단들의 느슨한 협의를 통해서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게?


그러나 난 신기하지 않다고 생각해. 이것이 바로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다원주의와 자유주의의 힘이야. 나는 사람들이 말하고, 말한 내용을 나누고, 그것을 통해 협업하는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만 있다면, 더 다양한 배경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다원주의), 그들의 그러한 자유가 제한될 때보다 시장될 때(자유주의), 더 나은 사회가 될 수 있다고 본 거야. 달리 말하면, 현재 MIT 미디어랩 디렉터를 하고 있는 나의 좋은 친구 조이 이토(Joi Ito)가 말한 것처럼 나는 기술이 아니라 "신념 체계"야. 나는 다양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사회가 더 나은 사회라는 것을 믿는 믿음 위에 세워진 정보통신기술이야. 나(인터넷)은 중립적이지 않아.


예를 들어, 소셜댓글이 실명제를 적용한 댓글보다 우세할 수 있었던 이유? 간단해. 후자는 강압적 법과 폐쇄적 기술의 합이지. 동의하지 않은 법의 적용이었고, 선택할 수 없는 기술과의 조합이었어. 그러나 전자는 자발적인 동의에 따른 결과고, 개방적인 기술(OAuth)을 활용한 산물이었어. 전자가 우세했던 까닭은 그것이 더 중립적이지 않은 나의 신념 체계에 근접했기 때문이야. 나의 신념 체계가, 내가 작동하는 기본 구조가 바뀌지 않은 이상, 나를 통해 만들어지는 세계 위에서는 개방과 공유가 폐쇄와 통제보다 더 우세할 수 밖에 없어.


그러나 그렇게 기득권을 전복할 수 있는 파괴적 혁신(creative destruction)이 지속되는 것이 모두에게 긍정적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너를 포함해서 내가 제공하는 자유를 제한하려는 사람들, 조직들은 끊임 없이 등장할 것이야. 그렇게 공유하는 게 나의 정신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내가 소개하는 나에 대해서, 나를 어떻게 다뤄줬으면 하는 것에 대해서 기억해줬으면 해서.


나를 만든 아버지 중 하나인 데이비드 클라크(David Clark)는 2009년 2월 3일 미국의 조지메이슨 대학에서 한 "인터넷의 오늘과 미래: 진화하는 기술의 사회적 함의(The Internet Today and Tomorrow: Social Implications of Evolving Technology)"란 발표에서 "기술적인 디자인을 선택하는 것은 사회 행위자들 간의 사회 계약의 균형을 바꿀 수 있다(Technical design choices can shift the balance of the social contract among the players)." 라고 말했어. 납득이 되지? 사람들이 너를 택한 더분에, 지난 5년 동안 피곤했잖아. 나만 중립적이지 않는 게 아냐, 모든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아. 기술적인 디자인이 바뀌면, 사회 계약이 깨져. 균형이 바뀌어. 누군가는 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더 손해를 보고, 그런 변화들이 생겨.


그래서 기술적 디자인을 바꾸는 것은, 특별히 이 시대에 물과 공기처럼 중요한, 새로운 인류의 공유자원인 나를 바꾸는 것은 더 신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더 심도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거야. 그렇지만 같은 강의에서 클라크 아저씨가 말한 것처럼 과학자, 기술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영향력을 생각하며 개발하는 것에 훈련되어 있지 않고(혹은 너무 바쁘거나, 관심이 없거나, 그럴 수 있는 의사 결정의 위치에 있지 않고), 인문사회학자들은 기술을 그냥 블랙박스처럼 취급하지. 그런 만큼, 더 나은 인터넷을 위한 더 나은 의사 결정이 쉽게 나오길 기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란 걸 알고 있어.


그러나 난 인류에 대한 희망과 긍정이 나의 시작이었던 만큼, 한 번 더 이 사람들을, 그리고 나를 새롭게 만들어 나갈 지금 이 세대를 믿어보려고 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는 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고, 이젠 나의 미래가 그들의 미래일 것이므로.




더 생각해볼 만한 주제들: 

  • 인터넷 정책 결정 과정에 아래부터 위로(bottom-up) 이루어지는 의사 결정 과정이 포함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 30년 후의 인터넷은 어떤 기술적 사회적 특성을 갖고 있을까요?



작성 2012.08.31 | 전략경영팀  김재연 전략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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